내가 쓴 글/여행 · 등산

천진암! 사찰인가? 천주교 성지인가?

밤하늘7890 2015. 3. 16. 13:02

봄 햇살이 완연한 3월 15일

어디론가 떠나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그동안 도로 이정표로만 접해왔던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진암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부고속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가 경안(광주)나들목을 빠져나와 퇴촌을 거쳐 도로의 끝 지점에 위치한 천진암에 도착하고 보니 이곳은 그동안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암자가 아니라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100년을 계획하여 거대한 성역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뭐야! 명칭으로 보나 위치상으로 보나 이곳은 절이 위치하고 있어야 할 곳인데……. 참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촌에서 천진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양쪽으로 높고 아름다운 산을 끼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기분으로 오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주차장에서 성지로 오르는 길 옆의 표지석

오르는 길은 완만한듯 보이지만 꽤 가파르고 멀었다.

 

 

5인의 묘역으로 오르는 길은 아직도 낙엽이 쌓여있어 운치가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계곡의 빙벽이 아직도 녹지 않고 계곡을 장식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를 있게한 이벽을 비롯한 5인의 묘역

산속을 둘러보니 겨울 찬바람에도 푸르름을 지켜온 산죽이 참 대견스러워 보인다.

성지를 내려오면서 바라본 풍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의구심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을 거야, “천진암” 분명히 절 이름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분명히 “천진암” 이라는 절이 존재했을지도 몰라! 그래! 인터넷의 힘을 빌리자 이럴 때 쓰라고 컴퓨터 있는 것 아니겠어? 검색해 보니 “천진암”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나의 무지함을 일깨워 준다. 그중 객관적으로 볼 때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정리해서 올려 본다.

 

18세기 중엽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 소장학자들은 이익(李瀷)의 서학열을 이어받아 독특한 학풍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경기도 광주와 여주 등지의 사찰에서 강학(講學)을 가졌다. 이 강학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천진암이다. 강학의 내용은 주로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를 위주로 하였으나 당시 전래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도 집중적으로 검토되어 결국 천주신앙으로 전개되었다. 천주교에 관계하였던 인물들 중 이곳을 자주 방문하였던 인물로는 이벽(李檗)과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이다. 천진암은 그 뒤 폐허가 되었으나 1962년에 남상철(南相喆)에 의하여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1979∼1981년 사이에 이벽·정약종(丁若鍾)·권철신·권일신(權日身)·이승훈(李承薰) 등 한국천주교회 초기 인물들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천주교 수원교구가 중심이 되어 이 일대 개발이 추진되어 현재 신도들의 순례에 필요한 각종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고, 가르멜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천진암성지에 지금은 천진암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재 터 잡고 있는 5인의 묘역자리가 천진암이 있었던 곳이다. 즉, 천진암에서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자리를 제공해 주었던 천진암 터 인 것이다. 천진암은 조선 말 가톨릭이 박해를 받을 당시 이들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다가 관아에 발각되어 10여명의 스님들이 처형당하고 절은 불태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문에도 천진암에서 이벽등 5인에게 자리를 제공하고 목숨을 걸고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대신 천진암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고, 이곳이 한국천주교의 발상지였다는 비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더구나 절터가 있었던 또 다른 장소에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 5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어서 성역화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쉼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난 천주교 신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신자도 아니다. 그런 나의 시각으로 볼 때 성지를 조성하면서, 비록 교리는 다르다 할지라도 예전 조선 말기 관아의 탄압을 피해 숨어들었던 이들을 목숨을 바쳐 도왔던 천진암의 승려들과 천진암의 역사를 거대하게는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비석 하나쯤은 기록으로 남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덮어버린다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를 아는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시선으로 이를 바라볼까? 이곳이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한다면 왜? 천진암이라는 명칭이 쓰여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쯤에서 한 번 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