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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금환락지, "운조루"와 "곡전재")

밤하늘7890 2013. 5. 30. 01:11

지리산 횡단도로를 뱀사골쪽에서 성삼재를 넘어 천은사를 거쳐 구례에 접어들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금환락지라 일컷는 토지면 오미리의 전통 한옥 "운조루"와 "곡전재"를 둘러 본다.

 

운조루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8호
지정연도 | 1968년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건립시기 | 1776년(영조 52년)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라는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 큰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1776)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자형 행랑채, ㅜ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다. 집을 지 은 12년 후에 유이주가 작성한   <장자구처기>에 따르면 최초 운조루는 78칸집이었다. 화재와 세월로 인한 유실, 필요한 의한 복구와 증축 등의 과정이 있었다. 2007년 문화재청의 실측 조사에 의하면 현재 63칸이 보존되어 있다. 운조루의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 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운조루' 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사랑채 이름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이른바 길지(吉地)로 유명한데 길지란 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란 뜻이다. 하지만 세상사 요행은 없는 것이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노동하고 그 댓가로 살아가는 사람사는 이치는 동일하다. 사람 살기에 안온한 땅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행랑채 큰 그림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의 외행랑은 동행랑과 서행랑으로 불렀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보면 양쪽 행랑에서 북쪽으로 솟아 올라간 익랑은 각각 동족침사(東足砧舍)와 서협랑(西挾廊)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없다. 행낭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문이 있어 안주인이 출입했다고 한다. 건축 당시 이 행낭은 대문을 중심으로 각각 12칸이었으나 지금은 동쪽이 11칸, 서쪽이 7칸만 남아있다.

 

연지 큰 그림

운조루 대문 앞으로는 마당은 없고 바로 긴 연못이 가로 놓여 있다.
연지에는 섬이 하나 있었다. 이는 삼신산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상류층의 조경관이었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현한 것이다.
주변으로 각종 연화(蓮花)를 비롯한 화초를 심었다.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사랑방 서쪽에는 대청 2칸이 있는데 이것이 운조루이다. 운조루는 이 집의 택호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의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새들은 날기에 지쳐 우리로 돌아오네

부제목

대문 큰 그림

대문은 1776년에 세워졌지만 얼마 되지 않은 1804년에 한 번 중수되었다.
창건주 유이주 사후 홍살문이 내려져서 중수된 것이다.

현재 대문은 맞배의 솟을대문이지만 최초 모습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보면 합각지붕이다.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솟을대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옛날에는 대문에 '호랑이 머리뼈'를 걸어 두었지만 도난을 맞은 이후 '말 머리뼈'로 대신하고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상생의 비결 |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

운조루에는 유명한 뒤주가 하나 있다.
이 뒤주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바로 '他人能解'이다. 타인능해, 즉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 원통형의 이 뒤주에는 세 가마니의 쌀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마을의 굶주리는 모든 이를 위해 이 뒤주는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창건주 류이주님은 한 달에 한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울 것을 명했다고 한다. 운조루는 대략 이백여 석의 쌀을 소출했는데 어떤 시기에는 전체 소출량의 20%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대개는 매년 삼십여 가마의 쌀을 양식 없는 이웃들을 위해 내어 놓았다고 한다. 쌀을 얻기 위해 운조루를 방문하는 일은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혹여 다른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주는 중간사랑채와 큰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헛칸에 두었다. 주인들과 쉽게 마주칠 가능성이 낮은 곳에 뒤주를 두고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능하면 이 뒤주의 사용을 자제했던 모양이다. 자기보다 더 힘든 이웃들을 위해 운조루의 뒤주를 양보했다. 오히려 근면하게 노동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결국 뒤주를 개방한 운조루의 마음과 뒤주를 여는 일을 자제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동일한 것이었다. 동학, 여순사건, 6.25 전쟁 등 이 아름다운 마을은 지리산이라는 '큰 산 아래에 산 죄'를 수도 없이 치루었다. 그 힘든 시간을 관통하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비결은 상생이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 쌀 뒤주

 

운조루 창건규모

아흔아홉칸? - 기록 78칸, 실측 85칸, 지금은 63칸을 보존하고 있는 집 -

《전라구례오미동가도》

창건주 유이주님은 68세 되던 해인 1793년에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 위해 일종의 재산목록 성격의 서류를 작성하는데 《장자구처기》라고 한다. 운조루의 최초 모습은《장자구처기》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창건 이후 20년도 지나지 않아 작성된 문건이기 때문이다.또한 창건 때의 도면은 아니지만 1800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 를 통해서도 비교적 초창 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장자구처기》의 기록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를 통해서 거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운조루는 최초 78칸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사랑채 뒤에 있는 나무청 2칸이 분재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나무청은 아마도 재산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 듯 하다. 사당의 정문인 신문과 중문을 비롯해 협문 3개가 생략된 것도 같은 이유라고 짐직한다. 따라서 나무청과 협문 및 중문을 합하면 모두 85칸에 이르는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건축면적을 고려한 칸수는 이보다 더 크다. 분재기의 칸수는 주칸 크기에 관계없이 실을 기준으로 산정했다. 즉 사랑채의 누마루인 족한정(足閒亭)은 실제 면적은 정면 1칸 측면이 2칸이어서 2칸으로 산정해야하지만 1칸으로 산정했다. 이는 방도 마찬가지다. 또 툇마루 등은 칸수 산정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실제 운조루의 칸수는 100여 칸에 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전라구례오미동가도》
운조루 소장. 사진인화본 접사. 채 명칭은 재산분재기인 '장자구처기(1793년)'에 의한 것이다. 표기상으로는 78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85칸 또는 100여칸에 육박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63칸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