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사는 쌍계사와는 달리 지리산 남쪽기슭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쌍계사에서 나와 화계천을 따라 칠불사를 오르는 길 또한 도로 양편이 벗나무로 터널을 이루고 있어 드라이브 하기에 아주 좋았다. 가는 길 주변이 산촌이어서 주변을 둘러 보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저만치 멀리 길 가운데 장끼 한마리가 길을 막고 한참을 꼼짝도 않고 서 있다. 놀랄까봐 비키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비킬 기미가 없어 카메라를 챙겨 찰칵 하려는 순간 길옆 숲으로 사라진다....ㅎㅎ
칠불사(七佛寺)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1605 ☎ 055-883-1869
칠불사는 지리산 계곡에 자리 잡은 고찰로,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이곳에서 수도한 뒤 모두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숱한 선승들이 머물렀는데, 조신시대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부휴 선수, 백암 성총 등의 고승들이 주석하였고, 근세에서는 용성ㆍ석우ㆍ효봉ㆍ금오ㆍ서암ㆍ일타ㆍ청화 스님 등이 안거를 지낸 바 있다. 이로 인해 예로부터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함께 2대 선원으로 부르던 유서 깊은 참선도량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한국 다도의 중흥조 초의선사가 머물며 차에 관한 명저 『다신전』을 짓기도 했다 선방인 아자방은 우리나라 온돌의 시초로, 한 번 때면 한 달 동안 온기가 지속될 정도로 교묘한 구조로 유명하다.
김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출현했다 하여 칠불사라 불리운 이 절은 한 번 불을 때면 49일간 따뜻했다는 아자방(亞字房)으로 유명하다. 절 대부분이이 여순반란 사건 때 소실되어 최근 중창 불사가 한창인데 불자 화백 손연칠씨가 요즘 일곱 왕자의 전설을 벽화로 묘사하고 있다.
칠불사는 지리산의 중심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은『옥룡자결』(玉龍子訣)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제일의 양택이라고 했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亞字房), 칠불각, 설선당,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대은율사와 금담율사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인해 1951년 1월경에 전소되었다.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년에 걸쳐 대웅전, 문수전, 아자방, 운상원,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 요사, 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탑비 등을 세웠다.
가야불교의 발상지
칠불사는 1세기경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金首露) 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화생(化生)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가락국에 온 인도 황하 상류의 태양왕조인 아유다국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였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에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정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 칠불의 명호는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이다. 이 칠왕자의 성불로 인하여 칠불사라 하였다.
이 외에 칠불사 경내에 있는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명칭 등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또 칠불사 인근 마을의 명칭인 범왕(凡王)마을과 대비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김수로왕이 칠왕자를 만나기 위하여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 화개면 정금리의 대비마을(大妃洞)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머물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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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계맥은 조선 순조 26년(1826) 병술(丙戌)에 대은낭오(大隱朗悟) 선사가 지리산 칠불사에서 『법망경』에 의하여 서상수계(瑞祥受戒)한 계맥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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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현금을 연구하여 새로운 곡조 30곡을 지었다. 이 곡조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선생이 운상원에서 나오지 않자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그 음률을 전수 받게 했다. 이에 윤흥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지리산으로 보내 귀금선생이 비장(秘藏)한 음률을 배워 오게 하니 귀금선생은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안장과 청장에게 전했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했다.(『삼국사기』, 권32. 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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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대렴공(大廉公)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화개동에 처음으로 심었다. |
해동계맥은 조선 순조 26년(1826) 병술(丙戌)에 대은낭오(大隱朗悟) 선사가 지리산 칠불사에서 『범망경』에 의하여 서상수계(瑞祥受戒)한 계맥이다.
『범망경』에 의하면 천리 안에 계를 줄 스승이 없으면 부처님께 기도하여 서상을 받으면 계체가 성립되어 부처님께 계를 받은 것이 된다고 했다.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에서 주석하던 대은선사가 서상계(瑞祥戒)를 받기 위하여 스승인 금담(錦潭)스님과 함께 칠불사로 와서 『범망경』에 의지하여 용맹 기도를 하는데, 대웅전에 모셔놓은 부처님 미간 백호로부터 한 줄기 상서러운 광명이 나와 대은스님의 정수리에 비추었다. 이렇게 해서 서상계를 받고, 스승인 금담스님은 제자인 대은스님으로부터 그 서상계를 전해 받았다. 그 계맥은 대은낭오(大隱朗悟), 금담보명(金潭普明), 초의의순(草衣意恂), 범해각안(梵海覺岸), 선곡율사(禪谷律師), 용성진종(龍城震鐘) 등으로 전해졌다.
신라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현금을 연구하여 새로운 곡조 30곡을 지었다. 이 곡조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선생이 운상원에서 나오지 않자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그 음률을 전수 받게 했다. 이에 윤흥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지리산으로 보내 귀금선생이 비장(秘藏)한 음률을 배워 오게 하니 귀금선생은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안장과 청장에게 전했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했다.(『삼국사기』, 권32. 樂)
칠불사가 위치한 화개면에 정금(井琴)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그 이름은 옥보고 선생이 칠불사의 옥보대인 운상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이 마을의 우물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하여 우물 정(井) 자, 거문고 금(琴) 자를 사용하여 정금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대렴공(大廉公)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화개동에 처음으로 심었다. 조선 순조(純祖) 28년(1828)에 초의선사가 차의 시배지인 화개동에 위치한 이 곳 칠불사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여가에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지은 『만보전서』(萬寶全書)의 다경채요(茶經採要)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하였다. 이 다신전을 기초로 하여 후일에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였다. 동다송은 4구를 1송(頌)으로 하여 모두 17송이고, 백파거사가 초의선사를 찬탄한 1송을 더하면 동다송은 모두 18송이다
칠불사는 그야말로 산사라고 말 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찾은 것이여서 일까? 아니면 너무나 깊이 운둔해 있는 고즈넉한 곳 이여서 그럴까 수도하하다 잠시 보행(운동)하러 나오신 스님들 몇분과 서너명의 관람객 외에는 별로 찾는 이들이 없는 조용한 사찰이었다. 특이한 것은 절 한쪽 산아래 시간 맞춰 멧돼지들의 먹이를 놓아 두면 멧돼지 가족들이 그 시간에 맞춰 내려와 먹이를 먹고 쏜살 같이 산속으로 들어 가 버린다. 멧돼지들이 오르내린 곳은 길이 나서 사람들이 다닌 길 보다 오히려 더 반질 거린다. 절의 스님들이 멧돼지들에게 공양 보시를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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